루카 7장 11-17절;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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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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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구약 시대부터 신약 시대를 넘어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약자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들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살 수 없는,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는 그런 이들을 상징하는 성경의 인물입니다.

엘리야도 예수님도 과부가 의지해 온 아들의 죽음을 묵과할 수 없었던 인간적인 이유는 ‘측은지심’ 때문이었지만, 실상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불러일으키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죽음이나 고통, 슬픔, 좌절에 인간을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다시 일으키시고,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희망을 심어 주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버렸습니다. 선택된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라는 고백처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실천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는 이웃 사랑에 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실천이 잘 안 되는 이유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을 너무 멀리서 찾기 때문입니다. 얼마간의 기부금을 내는 정도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지 말고, 혹시 내 가족 가운데, 내 가장 가까운 친구와 교우들 가운데, 나와 무관하다고 여겨 온 내 이웃들 가운데 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을 안고 있는 이들은 없는지 살펴볼 때입니다. (출저:https://maria.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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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과부 입장에서

    – 젊은이의 입장에서

    – 예수님의 입장에서

2. 나는 죽음데 대해 어떤 두려움이나 걱정이 많은지 묵상해 보고 죽음의 문제를 극복한 그리스도인임에 감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 극복하지 못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만약 나의 죽음이 가까이 있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이 어두운 마음을 빛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믿음의 실천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는 이웃 사랑에 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에서 주위의 형제/자매들은 믿음의 실천을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누가 도움이 필요한지,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아직 하고 있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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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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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의 앞바다에는 무게가 8톤이나 되는 거대한 그리스도상이 잠겨 있는데,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제노바에서 큰 해전이 벌어져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바닷속 깊은 곳에 묻힌 수많은 젊은이를 회상하며 주로 그 부모들의 헌금으로 이 조각을 봉헌하였다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상은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낮은 곳에 내려오시어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고, 고통당하시고, 짐을 지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 성문에서 장례 행렬을 보시게 됩니다. 죽은 이는 젊은이였고, 그의 가족이라곤 어머니뿐이었습니다. 과부는 당시에 의지할 데 없는 약자 중의 약자였는데, 그녀는 그나마 아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마저도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다른 성경 구절을 보면 누구인가 청했을 때에야 예수님께서 응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먼저 나서십니다. 그리고 과부를 위로하시고 죽은 그녀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깊은 연민과 자애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12,15).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는 바로 우리가 주님으로 믿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분이시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시니, 우리 또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출저:https://maria.catholic.or.kr/)